이원호 《얄궂게 파란》, 파란 이삿짐 박스에 쌓인 가치와 기억
부산 갤러리 인터페이스 이원호 개인전, 익숙한 사물을 다시 보는 법
이삿짐을 옮길 때 흔히 보는 파란색 플라스틱 박스가 전시장에 놓이면 어떻게 달라질까요. 평소에는 물건을 담고 나르는 도구일 뿐이지만, 어디에서 누가 사용하는지에 따라 의미는 크게 달라집니다.
부산 갤러리 인터페이스에서 열리는 이원호 개인전 **《얄궂게 파란》**은 이런 일상의 사물에서 시작합니다. 작가는 파란 이삿짐 박스와 고방유리를 통해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가치와 규칙, 장소와 기억을 다시 바라봅니다.
파란 이삿짐 박스가 작품이 된 이유
파란 플라스틱 박스는 특별한 물건이 아닙니다.
이사 현장에서는 짐을 옮기는 용기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일을 위한 도구가 됩니다. 사적인 물건과 기록을 외부로 이동시키는 상황에서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같은 물건인데 역할은 계속 달라집니다.
이원호는 바로 이 지점에 주목합니다. 사물의 가치는 그 자체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놓인 장소와 관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보호하면서 동시에 밖으로 옮기는 사물
박스는 물건을 안전하게 보호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물건을 원래 있던 장소에서 꺼내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는 역할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의 파란 박스 안에는 보호와 노출, 정착과 이동, 소유와 폐기처럼 서로 반대되는 상황이 공존합니다.
무엇을 담을 것인지 선택하는 순간 무엇을 남겨둘 것인지도 함께 결정됩니다.
평범한 이삿짐 박스가 생각보다 복잡한 사회적 관계를 품게 되는 이유입니다.
고방유리 너머의 흐릿한 기억
이번 전시에서는 고방유리도 중요한 재료로 등장합니다.
표면에 요철이 있는 고방유리는 유리 너머의 존재를 볼 수는 있지만 정확한 모습까지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작가에게 이 유리는 과거 살았던 집의 기억과 연결됩니다.
집 자체는 재개발로 사라졌지만 창과 유리, 빛의 느낌 같은 작은 감각은 오히려 오래 남았습니다.
저도 예전에 살던 집을 떠올리면 방의 정확한 구조보다 창문으로 들어오던 빛이나 오래된 문 같은 장면이 더 먼저 떠오르곤 합니다. 기억은 모든 것을 동일한 선명도로 보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보인다고 해서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고방유리를 사이에 두면 존재는 보이지만 정확하게 알아보기는 어렵습니다.
이원호는 이 상태를 기억의 방식과 연결합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봤다는 이유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기억에 남은 것은 전체가 아니라 일부분일 수 있습니다.
어떤 것은 사라지고 당시에는 중요하지 않았던 냄새나 색, 질감이 오히려 오래 남기도 합니다.
전시는 이처럼 ‘보이는 것’과 ‘알고 있는 것’ 사이의 거리를 드러냅니다.
반복되는 파란 박스 속 작은 어긋남
동일한 규격의 파란 박스가 여러 개 반복되면 처음에는 매우 질서정연하게 보입니다.
하지만 가까이 살펴보면 사용 흔적과 작은 차이, 쌓이는 과정에서 발생한 미세한 어긋남이 보입니다.
작가는 이러한 틈을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완벽해 보이는 질서에 다른 시간과 관계가 들어올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으로 바라봅니다.
여러분은 가지런하게 맞춰진 구조와 작은 어긋남이 있는 구조 가운데 어느 쪽에서 더 오래 시선이 머무시나요?
사라진 것은 정말 끝난 것일까
이번 전시에는 기능을 다한 노끈이나 사라진 장소에서 남은 물질처럼 이미 역할을 마친 것들도 등장합니다.
작가는 그것에 억지로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려 하지 않습니다.
대신 기능이 사라져도 그 사물이 지나온 시간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장소는 기억이 되고, 사건은 흔적이 되며, 사물은 다른 형태로 현재에 다시 개입합니다.
사라짐을 완전한 부재가 아니라 다른 상태로 이동하는 과정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왜 제목은 ‘얄궂게 파란’일까
이번 전시에서 파랑은 단순한 색이 아닙니다.
같은 색과 규격으로 반복되면서 모든 것을 하나의 질서 안에 묶는 듯 보이지만, 그 안의 차이까지 완전히 지우지는 못합니다.
‘얄궂다’라는 말 역시 하나의 감정으로 정리하기 어렵습니다.
좋으면서도 불편하고, 그립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은 마음처럼 상반된 감정이 동시에 존재합니다.
그래서 **《얄궂게 파란》**이라는 제목은 전시 전체의 복잡한 상태를 꽤 정확하게 보여줍니다.
판단을 잠시 늦추는 전시
우리는 사물을 보면서 빠르게 판단합니다.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필요한지 버려도 되는지, 보았으니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원호의 작업은 바로 그런 판단의 속도를 잠시 늦춥니다.
《얄궂게 파란》은 익숙한 파란 박스와 오래된 유리를 통해 가치와 기억이 얼마나 불완전하고 관계적인 것인지 다시 생각하게 하는 전시입니다.
작품을 본다면 파란색 자체보다 박스가 어디에 놓여 있고, 고방유리를 통과한 시선이 무엇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무엇을 흐리게 만드는지 살펴보세요. 우리가 평소 당연하게 여겼던 기준 사이에 의외로 많은 틈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원호 《얄궂게 파란》 전시 정보
전시명: 《얄궂게 파란》
작가: 이원호
전시 기간: 2026년 9월 18일~10월 10일
관람 시간: 11:00~18:00
휴관일: 일요일·월요일
오프닝: 9월 18일 오후 6시
전시 장소: 갤러리 인터페이스
주소: 부산 부산진구 신천대로220번길 65, B103호
주요 소재: 파란 이삿짐 플라스틱 박스, 고방유리, 노끈, 장소의 흔적
주요 키워드: 가치와 규칙, 소유와 이동, 장소와 기억, 흔적과 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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