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경 《가물 玄(Unseen)》, 보이지 않는 시간과 땅의 기억을 그리다

 

김유경 《가물 玄(Unseen)》, 보이지 않는 시간과 땅의 기억을 그리다

한 장소가 완전히 달라져도 그곳의 기억까지 사라질까. 바다가 매립돼 땅이 되고 오래된 풍경이 새로운 건물로 바뀌어도, 사람의 기억과 땅속의 시간은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부산 갤러리 궁에서 열리는 김유경 개인전 《가물 玄(Unseen)》​은 이런 보이지 않는 흔적을 따라가는 전시다. 작가는 식민과 냉전의 영향을 받은 땅을 탐색한 《주름진 밤》(2025~2026)과 장소의 기억에서 출발한 《곶》(2026)을 중심으로 회화와 설치, 드로잉, 영상을 선보인다.



‘가물 玄’은 단순한 검은색이 아니다

전시 제목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글자는 玄(현)​이다.

‘현’은 단순히 검다는 뜻에 머물지 않는다. 너무 깊고 멀어 검게 보이는 상태, 안과 밖이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맞닿는 경계를 함께 떠올리게 한다. 작가는 이를 ‘가물가물하다’라는 감각과 연결한다.

분명 존재했지만 이제는 선명하게 기억나지 않는 풍경, 사라진 듯하면서도 마음 어딘가에 계속 남아 있는 장면이 이번 전시의 중요한 출발점이다.


부산의 사라진 바다에서 시작된 《곶》

《곶》 연작에는 작가의 고향인 부산에 대한 개인적인 기억이 담겨 있다.

어린 시절 보았던 해안은 매립되면서 바다가 아닌 땅으로 변했고, 익숙했던 풍경도 시간이 흐르며 낯선 장소가 되었다. 그곳을 다시 찾은 작가는 오래된 숲에서 과거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생명의 흔적을 발견한다.

작품에서는 흰 여백 위로 검은 선들이 겹겹이 쌓인다. 선들은 나뭇가지나 뿌리처럼 보이기도 하고, 사라진 길이나 기억의 흔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저도 오래전에 살던 동네를 다시 찾았을 때 건물은 모두 달라졌는데 이상하게 길의 방향만은 몸이 기억하고 있어 놀란 적이 있다. 김유경의 작업 역시 눈보다 몸과 기억이 먼저 알아보는 풍경에 가까워 보인다.


《주름진 밤》, 땅에 축적된 역사를 바라보다

전시의 또 다른 중심축인 **《주름진 밤》**은 식민과 냉전의 흔적이 중첩된 장소를 오랫동안 답사하며 시작된 작업이다.

작가에게 땅은 고정된 자연이 아니다. 과거와 현재, 인간과 자연의 시간이 동시에 쌓이는 살아 있는 장소다. 화면에 등장하는 검은 땅과 바위, 나무와 뿌리는 실제 풍경을 그대로 묘사하기보다 그곳에 축적된 역사와 삶의 흔적을 압축해 보여준다.

그래서 그림을 볼 때 특정 장소를 찾으려고 하기보다 검은 형태가 어디에서 시작되고 어디로 이어지는지를 따라가 보는 편이 좋다.


흑백으로 그리는 이유

김유경의 작품에서 색은 상당히 절제돼 있다.

검은 선과 흰 여백이 강하게 대비하면서 화면에는 깊은 침묵이 생긴다. 검은색은 단순히 어둠이나 슬픔을 의미하지 않는다. 너무 오래되고 깊어 정확한 형태를 알 수 없는 시간의 층처럼 느껴진다.

흰 공간 역시 비어 있는 부분이 아니다. 형상이 완전히 나타나기 전, 또는 사라진 뒤에도 남아 있는 시간처럼 작동한다.

여러분이라면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여백을 ‘빈 공간’이라고 생각할까. 이 전시에서는 오히려 그 여백 때문에 보이지 않는 풍경을 더 많이 상상하게 된다.


보이는 풍경보다 그 아래의 시간을 보다

우리는 보통 장소를 현재의 모습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한 장소에는 이전의 건물과 길, 그곳을 살았던 사람과 사건의 흔적이 여러 겹으로 겹쳐 있다. 김유경은 바로 그 보이지 않는 층을 회화로 더듬는다.

특히 작품에서 반복되는 뿌리는 의미심장하다. 뿌리는 땅 위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나무를 지탱하고 다른 생명과 연결된다. 역사와 기억도 이와 비슷하다. 겉으로 사라진 것처럼 보여도 현재의 풍경 아래 계속 존재할 수 있다.


영상으로 확장되는 ‘가물’의 시간

이번 전시에서는 회화와 드로잉뿐 아니라 영상 협업 작업도 함께 소개된다.

정지된 화면에서 느껴지던 시간의 흔적이 움직임을 얻으면서 ‘가물 玄’이라는 개념도 다른 차원으로 확장된다. 전시는 보이지 않는 과거를 명확하게 복원하기보다 오래되고 깊어 쉽게 붙잡히지 않는 세계 앞에 관람객이 잠시 머물도록 한다.

그 때문에 빠르게 작품의 의미를 파악하려 하기보다 전시장 안에서 검은 선과 여백, 움직이는 이미지 사이에 조금 오래 머물러보는 방식이 잘 어울린다.


사라진 것은 정말 없는 것일까

《가물 玄(Unseen)》은 기억을 선명하게 복원하는 전시가 아니다.

오히려 기억이 흐려지고 풍경이 변해가는 상태 자체를 바라본다. 매립된 바다와 오래된 숲, 땅속에 남아 있는 역사처럼 눈앞에서 보이지 않는 것이 현재를 어떻게 구성하는지 생각하게 한다.

김유경의 작품에서 사라짐은 완전한 부재가 아니다. 다른 형태로 남아 계속 현재와 관계를 맺는 또 하나의 존재 방식이다.

부산이라는 장소의 변화와 개인의 기억, 역사적 시간이 어떻게 한 화면 안에서 겹쳐지는지 천천히 살펴보고 싶다면 오래 머물러볼 만한 전시다.


김유경 《가물 玄(Unseen)》 전시 정보

전시명: 가물 玄(Unseen)
작가: 김유경
전시 기간: 2026년 8월 28일~10월 25일
전시 장소: 갤러리 궁 2·3층
주소: 부산 해운대구 좌동로 21
오프닝 리셉션: 2026년 8월 28일 오후 7시
휴관일: 매주 화요일 및 공휴일
주요 작품: 《주름진 밤》(2025~2026), 《곶》(2026)
분야: 회화, 설치, 드로잉, 영상

※ 공개 안내에는 관람 시간이 상단에 11:00~19:00, 상세 안내에는 11:00~17:00​으로 다르게 표기되어 있어 방문 전 갤러리의 최신 관람시간을 확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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