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크 리 《Idyll by the Tide》, 흑백의 기억 속에서 떠오르는 가족과 바다
마이크 리 《Idyll by the Tide》, 흑백의 기억 속에서 떠오르는 가족과 바다
어떤 기억은 선명한 사진처럼 남지 않습니다. 얼굴은 흐릿하고 장소도 정확하지 않은데, 그때의 감정만은 이상하리만큼 오래 남아 있죠.
제이슨함에서 열리는 마이크 리(Mike Lee)의 개인전 《Idyll by the Tide》는 바로 그런 기억의 성질을 흑백 회화로 풀어냅니다. 전시는 2026년 8월 29일부터 11월 1일까지 열리며, 마이크 리가 오랫동안 이어온 모노크롬 회화를 바탕으로 가족과 일상, 정체성과 친밀함을 다시 바라봅니다.
흑백으로 그리는 이유
마이크 리의 그림은 거의 대부분 회색조입니다.
처음 보면 디지털 이미지나 에어브러시로 만든 것처럼 매끈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유화 물감을 여러 겹 쌓아 완성한 회화입니다. 빛과 그림자의 대비를 정교하게 조절하면서 인물과 공간을 단순한 형태로 압축합니다.
색을 줄였기 때문에 오히려 몸의 움직임과 장면의 분위기가 더 또렷하게 느껴집니다.
저도 마이크 리의 작품을 보면 얼굴보다 먼저 사람 사이의 거리나 몸짓을 보게 됩니다. 표정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데도 이상하게 상황의 감정은 읽힌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기억은 완전한 형태로 남지 않는다
마이크 리의 작업에서 기억은 중요한 키워드입니다.
그의 인물은 구체적인 얼굴이나 세부 묘사가 지워져 있습니다. 장면 역시 사진처럼 정확하게 설명되지 않습니다.
이런 방식은 우리가 과거를 떠올리는 과정과 닮아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얼굴이나 장소의 세부는 흐려지지만 누군가와 함께했던 분위기나 감정은 오래 남습니다. 작가는 이런 불완전한 기억의 방식을 흑백과 단순화된 형태로 표현합니다.
《Idyll by the Tide》, 제목에 담긴 분위기
전시 제목인 ‘Idyll by the Tide’에서 ‘Idyll’은 평화롭고 목가적인 장면이나 짧은 서정을 뜻하고, ‘Tide’는 밀물과 썰물처럼 반복해서 움직이는 물의 흐름을 떠올리게 합니다.
두 단어를 함께 놓으면 고요한 순간과 끊임없이 변하는 시간이 동시에 느껴집니다.
기억도 비슷합니다.
한때 분명 존재했던 평온한 장면이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변하고, 현재의 경험에 따라 다시 다르게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가족은 가장 가까운 기억의 풍경
마이크 리의 작품에는 가족과 일상의 장면이 자주 등장합니다.
아이를 안고 있는 사람, 누군가와 함께 움직이는 인물, 집 안의 조용한 순간처럼 거대한 사건보다 개인적인 경험에 가까운 장면을 선택합니다.
하지만 등장인물의 얼굴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기 때문에 작품은 작가 자신의 가족사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관람객은 그 장면에 자신의 기억을 자연스럽게 겹쳐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오래된 가족사진을 볼 때 사진 속 정확한 장소보다 그날의 분위기가 먼저 떠오를 때가 있으신가요? 마이크 리의 그림은 바로 그런 감각에 가깝습니다.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정체성
마이크 리는 1983년 미국 캘리포니아 플라센티아에서 태어난 한국계 미국인 작가로 현재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성장한 이민 2세대로서의 경험 역시 최근 작업의 중요한 배경으로 이어집니다.
작가는 하나의 정체성을 선언하기보다 가족과 생활, 기억 속 장면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 천천히 탐색합니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서는 ‘한국인인가 미국인인가’ 같은 단순한 구분보다 서로 다른 문화적 경험이 한 사람 안에서 어떻게 겹쳐지는지가 더 중요하게 느껴집니다.
애니메이션 경험이 만든 그래픽한 화면
마이크 리의 그림이 독특하게 보이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의 애니메이션 작업 경험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그는 과거 애니메이션 분야에서 컬러 키 아티스트로 활동했으며, 《아이스 에이지》와 《리오》 같은 장편 애니메이션 작업에 참여한 이력도 있습니다.
이런 경험은 화면을 간결하게 구성하고 인물의 동작만으로 상황을 전달하는 방식에서도 느껴집니다.
형태는 단순하지만 장면은 마치 영화의 한 프레임처럼 앞뒤의 이야기를 상상하게 합니다.
이번 전시에서 주목할 ‘Low Tide’
전시에 출품되는 작품 가운데 《Low Tide》(2025)는 제목부터 이번 전시의 분위기를 잘 보여줍니다. 이 작품 역시 《Idyll by the Tide》에 소개될 예정입니다.
썰물은 물이 빠지는 시간이지만 완전한 끝은 아닙니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물이 들어옵니다. 그런 반복은 마이크 리가 오랫동안 다뤄온 기억의 방식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장면이 다시 떠오르고, 예전의 기억이 현재의 감정에 따라 새롭게 보이는 과정입니다.
10년 넘게 이어온 흑백 회화의 변화
마이크 리는 10여 년 동안 흑백 중심의 회화를 꾸준히 이어왔습니다.
초기의 작품부터 현재까지 단순화된 인물과 강한 명암이라는 기본적인 언어는 유지하지만, 최근에는 자신의 가족과 정체성, 친밀한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더욱 구체적으로 화면에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전시는 흑백이라는 형식보다 그 안에서 작가의 관심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얼굴을 지워야 더 많은 사람이 들어온다
마이크 리의 인물은 표정이 거의 없습니다.
얼굴을 세밀하게 그리지 않으니 특정 인물의 초상이라기보다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개인적인 기억을 그리지만 세부를 지우면서 오히려 다른 사람의 기억이 들어갈 공간을 만드는 것, 이것이 마이크 리 회화의 중요한 매력입니다.
《Idyll by the Tide》에서는 작품 앞에서 ‘누구를 그린 것인가’를 찾기보다 인물 사이의 거리와 빛의 방향, 장면이 남기는 감정을 천천히 따라가 보세요.
흑백의 조용한 화면 안에서 어느 순간 자신의 기억과 닮은 장면 하나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마이크 리 《Idyll by the Tide》 전시 정보
전시명: 《Idyll by the Tide》
작가: Mike Lee 마이크 리
전시 기간: 2026년 8월 29일~11월 1일
전시 장소: 제이슨함 Jason Haam
지역: 서울
관람료: 무료
주요 분야: 회화
주요 키워드: 흑백회화, 기억, 가족, 정체성, 친밀함,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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