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고한 바위, 무모한 싸움들》 김 크리스틴 선, 소통의 구조를 다시 묻다

 

《완고한 바위, 무모한 싸움들》 김 크리스틴 선, 소통의 구조를 다시 묻다

우리는 매일 수많은 말을 주고받지만 정말 서로를 이해하고 있을까.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다고 생각하면서도 사실은 자신의 생각만 반복하고, 같은 문장을 놓고도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김 크리스틴 선(Christine Sun Kim)은 바로 이런 언어와 소통의 구조를 오랫동안 작업의 중심에 두어온 작가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열리는 《MMCA×LG OLED 시리즈 2026: 김 크리스틴 선-완고한 바위, 무모한 싸움들》은 드로잉과 영상, 사운드, 수어를 결합해 우리가 서로 소통하고 충돌하며 관계를 조정하는 과정을 하나의 거대한 공간 안에 펼쳐 보인다. 전시는 서울관의 중심 공간인 서울박스를 활용한 장소특정적 설치로 구성된다.



김 크리스틴 선, ‘소리’를 눈으로 다시 생각하다

김 크리스틴 선은 한국계 미국인 작가로 베를린을 기반으로 활동한다.

드로잉과 벽화, 영상, 퍼포먼스, 설치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며 언어와 번역, 접근성, 사회적 관계와 권력의 구조를 지속적으로 탐구해왔다. 특히 농인으로서 경험한 언어 환경은 작업의 중요한 출발점이 됐다.

그의 작업에서 소리는 반드시 귀로 듣는 대상이 아니다. 선과 기호, 움직임과 공간의 리듬을 통해 소리를 시각적인 경험으로 전환한다.

저도 김 크리스틴 선의 작업을 처음 접했을 때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소리를 보여준다’는 발상보다,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했던 의사소통 방식 자체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이었다.


서울박스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드로잉이 되다

이번 작품에서 가장 먼저 시선을 압도하는 것은 서울박스 전체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선이다.

검은 선과 기호는 벽에서 시작해 바닥과 유리까지 이어지고, 중앙에는 대형 곡면 OLED 화면이 설치된다. 55인치 OLED 72대로 구성된 화면에서는 문장과 수어, 애니메이션이 끊임없이 움직이며 공간의 드로잉과 연결된다.

그래서 작품을 한쪽 벽에서 바라보는 일반적인 전시 감상법은 잘 맞지 않는다.

직접 공간을 걸으며 선의 방향과 화면의 움직임, 사운드와 자신의 위치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경험해야 한다. 관람객의 이동 역시 작품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만화의 ‘모션 라인’이 언어가 되다

작품 속 선을 자세히 보면 어딘가 익숙하다.

만화에서 인물이 빠르게 움직이거나 물체가 충돌할 때 등장하는 모션 라인(Motion Line)을 떠올릴 수 있다. 김 크리스틴 선은 이런 시각적 표현과 미국 수어의 움직임을 결합해 자신만의 조형 언어로 발전시켰다.

선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속도와 방향, 긴장과 충돌을 나타낸다.

한 방향으로 흐르던 선이 갑자기 꺾이고 다른 선과 부딪치는 모습을 따라가다 보면 마치 두 사람이 대화하다 의견이 엇갈리고 다시 관계를 조정하는 과정처럼 보인다.


‘완고한 바위’는 누구를 말하는가

전시 제목 《완고한 바위, 무모한 싸움들》도 의미심장하다.

작품 속 ‘바위’는 아무리 이야기해도 움직이지 않는 상대를 떠올리게 한다. 온라인과 현실에서 서로 자신의 주장만 반복하며 끝없이 충돌하는 모습과도 연결된다.

하지만 작가는 바위를 단순히 ‘고집 센 타인’으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때로는 자신의 확신에 갇혀 다른 사람의 언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 자신이 바위가 될 수도 있다.

여러분은 누군가와 의견이 다를 때 상대의 말을 바꾸려고 먼저 하는가, 아니면 자신의 입장도 다시 살펴보는가. 이 전시는 바로 그 지점을 건드린다.


수어와 음성언어 사이에 존재하는 권력

김 크리스틴 선의 작업에서 중요한 또 하나의 주제는 언어의 권력이다.

사회는 대부분 음성언어를 중심으로 설계돼 있다. 그 안에서 수어와 자막, 통역은 종종 ‘보조 수단’으로 취급된다.

그러나 작가는 이런 위계를 뒤집는다. 미국 수어의 움직임과 구조를 작품의 중심에 놓고 음성과 글자, 그림을 동일한 소통의 요소로 다룬다. 누가 말할 수 있고 누구의 언어가 중심이 되는지, 또 누가 의사소통 과정에서 배제되는지를 묻는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장애나 농인의 경험만을 다룬 작업으로 한정해서 보면 핵심을 놓치기 쉽다.

문제는 결국 우리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경험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가에 있다.


작품 속 드로잉은 하나의 ‘악보’

김 크리스틴 선은 이번 작품에서 벽과 바닥의 드로잉을 하나의 악보처럼 바라본다.

선과 기호가 악보라면, OLED 화면 속 애니메이션은 그 악보를 연주하는 움직임에 가깝다. 사운드까지 더해지면서 이미지와 언어가 시간 속에서 변화한다.

그래서 전시장에서는 작품을 읽기보다 ‘느껴보는’ 방식이 더 어울린다.

어떤 선이 빠르게 움직이는지, 어디에서 충돌하고 멈추는지 따라가다 보면 대화의 리듬과 긴장을 몸으로 경험하게 된다.


이해보다 중요한 것은 관계를 계속 이어가는 일

이번 전시가 던지는 가장 인상적인 메시지는 소통이 항상 완벽한 이해로 끝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상대의 생각을 모두 이해하거나 하나의 의견으로 합쳐지는 것이 반드시 좋은 소통의 결과는 아니다. 서로 다른 감각과 언어를 인정하면서 계속 조정하고 번역하는 과정 자체가 중요할 수 있다.

《완고한 바위, 무모한 싸움들》은 그래서 단순한 미디어아트 전시가 아니다.

언어는 누구를 위해 만들어졌는가,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말을 실제로 듣고 있는가, 그리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 움직이지 않는 바위가 되고 있지는 않은가.

서울박스 전체를 가득 채운 선과 영상 사이를 걷다 보면 이런 질문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현대미술을 통해 인간관계와 소통의 구조를 새롭게 바라보고 싶다면 천천히 공간 전체를 걸어보길 권하고 싶은 전시다.


《완고한 바위, 무모한 싸움들》 전시 정보

전시명: MMCA×LG OLED 시리즈 2026: 김 크리스틴 선-완고한 바위, 무모한 싸움들
작가: 김 크리스틴 선(Christine Sun Kim)
전시 기간: 2026년 7월 31일~11월 29일
전시 장소: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서울박스
분야: 드로잉, 벽화, 영상, 사운드, 설치
주요 주제: 언어, 번역, 수어, 접근성, 소통, 사회적 관계
주최: 국립현대미술관
협력: LG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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