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림 개인전 《숨, 이어지다》
강유림 개인전 《숨, 이어지다》, 대나무 숲에 쌓인 시간의 결
바람이 지나간 숲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흔적이 남는다.
대나무 잎이 잠시 흔들리고, 줄기 사이로 스며든 빛은 조금씩 자리를 옮긴다. 찰나의 움직임은 금세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연은 그 순간들을 겹겹이 품으며 자신의 시간을 만들어간다.
서울 종로구 부암동 하랑갤러리에서 열리는 강유림 개인전 《숨, 이어지다》는 자연에 축적된 시간과 존재의 호흡을 회화로 바라보는 전시다. 오랫동안 인간의 얼굴을 통해 삶의 흔적을 탐구했던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시선을 숲과 대나무로 넓힌다. 전시는 2026년 8월 12일부터 8월 23일까지 이어진다.
얼굴에서 자연으로 이어진 시선
강유림 작가에게 얼굴은 한 사람이 지나온 시간이 응축된 풍경이었다.
표정과 주름, 시선에는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드러나는 삶의 흔적이 담긴다. 작가는 오랜 시간 타인의 얼굴을 바라보며 존재에 관한 질문을 이어왔고, 그 질문은 자연스럽게 숲으로 향했다.
숲 역시 인간처럼 시간을 품는다. 대나무는 같은 자리를 지키면서 끊임없이 자라고, 빛과 바람은 수많은 줄기 사이를 지나간다. 작가는 자연을 멀리서 관찰하는 대상으로 보지 않고, 시간과 생명이 함께 머무르는 유기적인 공간으로 바라본다.
먹과 석채로 쌓아 올린 시간
초기 작업에서 작가는 한지에 먹이 스며들고 마르는 과정을 반복하며 화면의 깊이를 만들었다.
먹의 짙고 옅은 농담은 단순한 명암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간 흔적이 된다. 한지의 결은 먹을 받아들이며 마치 기억을 품는 그릇처럼 작동하고, 반복되는 붓질은 하루하루의 시간을 화면에 새기는 수행이 된다.
최근 작업에서는 석채를 사용해 물성과 색채의 층을 더욱 두텁게 만든다. 석채는 천연 광물 등을 곱게 갈아 만든 안료로, 입자감과 깊은 색채가 특징이다. 색을 올렸다가 다시 덜어내는 과정을 거치면서 화면에는 매끄럽게 정리되지 않은 시간의 결이 남는다.
대나무가 만드는 수직의 리듬
이번 전시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대나무는 단순한 풍경 소재가 아니다.
곧게 뻗은 줄기는 화면에 수직적인 리듬을 만들고, 서로 기대어 선 대나무들은 각자의 자리를 지키면서도 함께 숲을 이루는 존재의 모습을 보여준다. 줄기 사이의 빈 공간과 희미한 흔적은 바람과 빛이 지나가는 통로가 된다.
형태를 자세히 묘사하기보다 덜어낼수록 화면에는 오히려 더 깊은 기운이 남는다. 작품을 멀리서 보면 고요한 대나무 숲이 먼저 들어오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먹의 번짐과 석채의 입자, 붓이 지나간 미세한 흔적이 보인다.
저도 숲을 그린 작품을 볼 때는 나무의 형태를 먼저 찾곤 했다. 그런데 강유림의 화면에서는 무엇을 그렸는가보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쌓였는가를 살피게 된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정지된 풍경 안에서 들리는 숨
《숨, 이어지다》의 작품은 겉으로는 고요하지만 완전히 멈춰 있지 않다.
흔들리는 잎과 반복되는 수직선, 켜켜이 쌓인 색의 층은 화면 안에서 느린 호흡을 만들어낸다. 작품 제목인 《보이지 않는 시간은 흔들리는 잎 사이를 천천히 지나간다》와 《매일 쌓아 올린 시간은 숲이 되어 다시 나를 바라본다》에서도 작가가 자연을 바라보는 태도를 읽을 수 있다.
여러분은 바쁜 일상 속에서 자신의 시간을 가만히 들여다본 적이 있는가. 작품 앞에 잠시 머물다 보면 숲의 시간과 관람객의 시간이 조용히 겹쳐지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그림을 그리는 일이 하나의 수행이 될 때
강유림 작가는 매일 반복하는 붓질을 수행처럼 받아들인다.
빠르게 완성된 결과를 만들기보다 색을 쌓고 덜어내며 화면이 스스로 깊어질 때까지 기다린다. 이러한 작업 방식은 계절과 시간을 견디며 천천히 자라는 자연의 방식과 닮아 있다.
작가는 자연의 외형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는다. 보이지 않지만 모든 존재를 이루고 있는 시간을 화면에 쌓으려 한다. 작품 앞에서 관람객이 잠시 자신의 삶을 바라보고, 존재의 감각을 조용히 마주하는 순간 작업은 비로소 완성된다.
《숨, 이어지다》는 화려한 사건보다 반복되는 하루와 천천히 축적되는 시간의 가치를 바라보게 한다. 부암동에서 고요한 숲의 기운과 깊이 있는 한국화의 질감을 만나고 싶다면 천천히 들러볼 만한 전시다.
강유림 개인전 전시 정보
전시명: 숨, 이어지다
작가: 강유림
전시 기간: 2026년 8월 12일~8월 23일
관람 시간: 오전 11시~오후 5시
휴관일: 매주 월요일·화요일
관람료: 무료
전시 장소: 하랑갤러리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자하문로38길 45, 1층
문의: 02-365-9545
후원: 강원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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