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형근을 다시 상상하다, ‘천지문’과 삶의 공간에서 만나는 단색화

짙은 갈색과 푸른색이 화면 위에서 천천히 스며들고, 두 개의 거대한 기둥 사이에는 비어 있는 공간이 남습니다. 단순해 보이지만 오래 바라볼수록 그 사이에서 흙과 하늘, 문과 길처럼 다양한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PKM갤러리에서 열리는 《윤형근을 다시 상상하다(reimagine Yun Hyong-keun)》는 한국 단색화를 대표하는 윤형근(1928~2007)의 작품 세계를 다시 살펴보는 전시입니다. 2026년 8월 26일부터 10월 3일까지 PKM과 PKM+ 전관에서 열리며, 197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제작된 대형 회화와 한지 작업 등 30여 점을 선보입니다. 이번 전시는 9월 1일 처음 공개되는 《윤형근의 집》 개관과 연결해 기획됐습니다.



울트라마린과 번트 엄버로 만든 ‘천지문’

윤형근의 회화를 이해할 때 가장 중요한 색은 울트라마린 블루(Ultramarine Blue)번트 엄버(Burnt Umber)입니다.

푸른색과 짙은 갈색을 섞어 만든 어두운 색은 그의 대표적인 ‘천지문(天地門)’ 회화로 이어졌습니다. 색은 한 번에 덮이지 않고 천이나 한지에 스며들면서 가장자리마다 다른 농도를 만듭니다.

두 개의 수직적인 색면 사이에는 비어 있는 부분이 남습니다.

그 빈 공간 때문에 화면이 닫혀 있기보다 오히려 어디론가 이어지는 문처럼 느껴집니다.


‘천지문’에서 하늘과 땅을 보다

‘천지문’이라는 이름에는 하늘(天), 땅(地), 문(門)이라는 단어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짙은 색의 기둥은 땅에서 솟은 존재처럼 보이기도 하고, 두 색면 사이의 공간은 하늘로 통하는 길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윤형근의 그림에는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 정해진 답이 없습니다.

저도 그의 작품을 볼 때 처음에는 두꺼운 검은 기둥만 보이다가 오래 바라보면 오히려 기둥 사이의 여백이 더 크게 느껴집니다. 그 순간 작품의 주인공이 색인지 빈 공간인지 쉽게 구분하기 어려워집니다.


초기의 서정적인 색에서 후기의 절제로

이번 전시는 윤형근의 유명한 천지문 회화만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1970년대 천지문 양식이 자리 잡은 대표작에서 시작해, 그 이전의 비교적 서정적인 색감을 담은 초기 작업과 더욱 간결하고 절제된 후기 작품까지 한자리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화면에 남는 것은 점점 줄어듭니다.

색도, 형태도, 붓질도 최소한으로 정리됩니다. 하지만 단순해질수록 화면의 긴장과 깊이는 오히려 더 커지는 것이 윤형근 회화의 특징입니다.


물감이 스며드는 시간도 작품이다

윤형근의 그림에서 중요한 것은 붓자국만이 아닙니다.

희석된 물감이 면이나 한지 속으로 스며들면서 색의 경계가 자연스럽게 번집니다. 작가가 모든 부분을 정확하게 통제하기보다는 재료가 스스로 만들어내는 흔적도 작품 안에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가까이에서 보면 하나의 짙은 색처럼 보였던 부분에도 수많은 농담이 존재합니다.

회화를 완성된 이미지라기보다 시간이 축적된 흔적으로 바라보면 윤형근의 작품이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단색화지만 ‘한 가지 색’만 이야기하지 않는다

윤형근은 한국 단색화를 대표하는 작가 가운데 한 명입니다.

단색화는 흔히 한 가지 색으로 그린 미니멀한 회화 정도로 이해되지만, 실제로는 반복적인 행위와 재료의 물성, 시간과 신체의 움직임이 중요한 흐름입니다.

윤형근의 작업 역시 색을 단순하게 줄이는 데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물감이 스며들고 마르는 과정, 화면 위에서 반복되는 수직 구조와 여백의 관계가 작품을 완성합니다.

그래서 전시장에서는 멀리서 전체 구도를 본 뒤 가까이 다가가 물감이 번진 경계와 화면의 표면을 함께 보는 것이 좋습니다.


《윤형근의 집》에서 만나는 또 다른 윤형근

이번 전시가 특별한 이유는 작품뿐 아니라 윤형근이 실제 살고 작업했던 공간도 함께 공개되기 때문입니다.

서울 마포구 서교동의 《윤형근의 집》은 9월 1일부터 10월 17일까지 처음 일반에 공개됩니다. 윤형근은 1967년부터 이곳에서 생활했으며, 1983년 기존 주택을 철거하고 동생인 건축가 윤도근에게 설계를 맡겨 새 집을 지었습니다. 공간의 형태와 재료에도 작가 자신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반영했습니다.


김환기에서 윤형근으로 이어지는 장소의 기억

《윤형근의 집》이 자리한 서교동 터에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땅은 1963년 윤형근의 장인이었던 수화 김환기(1913~1974)가 국민주택으로 처음 분양받은 곳입니다. 이후 윤형근이 생활하고 작업하는 공간으로 이어졌습니다.

한국 현대미술의 중요한 두 작가가 하나의 장소를 통해 연결되는 셈입니다.

미술관에서 작품만 보는 것과 작가가 실제 사용한 공간을 경험하는 것은 상당히 다릅니다. 작업실의 크기와 가구, 도자기와 생활용품까지 함께 보면 그림에서 느껴졌던 절제된 감각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도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삶과 예술을 분리하지 않았던 화가

《윤형근의 집》 1층 작업실에는 작가가 사용했던 공간의 흔적을 살리면서 시기별 대표작이 전시됩니다. 별도의 자료실과 영상실에서는 예술가뿐 아니라 남편과 아버지로 살아온 윤형근의 모습도 만날 수 있습니다. 2층 거실과 주방, 안방 역시 당시 모습을 최대한 보존했습니다.

이런 구성을 보면 윤형근의 그림을 단순히 미술사적 양식으로만 설명하기 어려워집니다.

그에게 작업실과 생활공간, 수집한 물건과 그림은 서로 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상상한다는 것

《윤형근을 다시 상상하다》라는 제목에는 과거의 거장을 기념하는 것보다 조금 더 적극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미 한국 단색화의 대표 작가로 굳어진 윤형근을 다시 처음 보는 것처럼 바라보자는 제안에 가깝습니다.

1970년대의 강한 천지문부터 말년의 절제된 화면까지 따라가고, 이어서 실제 생활 공간인 《윤형근의 집》을 본다면 하나의 작품이 작가의 삶과 어떻게 연결돼 있었는지 더욱 선명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윤형근의 그림은 비워낸 화면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색이 스며든 시간과 삶의 흔적이 깊게 축적돼 있습니다.

화면을 빠르게 지나가기보다 색면과 여백 사이에 잠시 시선을 두어보세요. 단순했던 두 기둥 사이에서 예상보다 훨씬 넓은 공간이 열릴 수 있습니다.


《윤형근을 다시 상상하다》 전시 정보

전시명: 《윤형근을 다시 상상하다(reimagine Yun Hyong-keun)》
작가: 윤형근 Yun Hyong-keun
전시 기간: 2026년 8월 26일~10월 3일
전시 장소: PKM갤러리 PKM & PKM+
주소: 서울 종로구 삼청로7길 40
관람 시간: 화요일~일요일 10:00~18:00
입장 마감: 17:30
휴관: 월요일
주요 구성: 1970년대~2000년대 대형 회화·한지 작업 등 30여 점

《윤형근의 집(Yun Hyong-keun House)》
공개 기간: 2026년 9월 1일~10월 17일
장소: 서울 마포구 와우산로21길 19-17
특징: 윤형근의 주거·작업 공간, 작업실·자료실·영상실 및 생활공간 공개
향후 운영: 2027년 봄부터 시즌제 재개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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