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상의 온도》, 변화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감각

 

《잔상의 온도》, 변화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감각

우리는 사건이 벌어진 순간보다 모든 것이 지나간 뒤 남은 감각을 더 오래 기억하기도 한다.

불길은 꺼지고 연기는 흩어지지만 그 자리를 바라보는 마음까지 곧바로 이전 상태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계절이 바뀐 뒤에도 공기와 풍경에는 지나간 시간의 흔적이 남는다. 부산 수영구 스페이스167에서 열리는 《잔상의 온도》는 바로 그 변화 이후의 시간을 바라보는 전시다.

김명준과 노형규 두 작가가 참여하는 이번 전시는 2026년 8월 5일부터 8월 29일까지 열린다. 서로 다른 시선으로 소멸과 생성, 끝과 시작, 기억과 가능성 사이의 미세한 움직임을 회화에 담아낸다.



잔상은 사라진 흔적만을 뜻하지 않는다

잔상은 눈앞의 대상이 사라진 뒤에도 시각이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이미지다.

그러나 이번 전시가 말하는 잔상은 과거의 흔적에만 머물지 않는다. 아직 현재를 통과하고 있는 감각이자, 변화가 완성되기 전 머무는 시간에 가깝다. 익숙했던 세계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지만 그 변화를 정확한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순간을 포착한다.

전시 제목에 사용된 ‘온도’ 역시 단순히 뜨겁거나 차가운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아직 식지 않은 기억, 새로운 세계가 나타나기 직전의 긴장, 눈에 보이지 않는 변화가 계속되고 있다는 감각을 가리킨다.

저도 어떤 장소를 다시 찾았을 때 건물과 길은 그대로인데 이전과 전혀 다르게 느껴졌던 경험이 있다. 변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말하기 어려워 더 오래 마음에 남았는데, 잔상이라는 단어가 그런 감각을 잘 설명해주는 듯하다.


김명준, 균열에서 시작되는 새로운 공간

김명준 작가의 작품 제목인 《Crack space》는 균열과 공간의 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균열은 일반적으로 파손이나 붕괴의 신호로 받아들여진다. 단단하게 유지되던 표면이 갈라지는 순간 이전의 질서가 더 이상 완전하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갈라진 틈은 동시에 새로운 공간이 시작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김명준의 회화에서는 변화가 선택되거나 시작되는 순간에 시선이 머문다. 화면의 균열은 단순한 파괴의 흔적이 아니라 기존의 세계를 벗어나 다른 가능성으로 이동하는 통로처럼 읽힌다.

관람할 때는 화면 전체를 빠르게 이해하려 하기보다 선과 면이 갈라지는 지점, 색의 흐름이 끊기거나 새롭게 이어지는 부분을 천천히 따라가 보는 것이 좋다. 균열이 어느 방향으로 확장되는지 살펴보면 작품 속 긴장과 변화의 움직임이 더 선명하게 느껴진다.


노형규, 변화가 세계에 스며든 이후

노형규 작가의 《돌속의 새 02》는 단단한 돌과 자유롭게 움직이는 새라는 서로 다른 이미지를 한 장면 안에 불러온다.

돌은 오랜 시간 같은 자리를 지켜온 존재처럼 보이지만, 그 내부에도 끊임없는 변화가 축적된다. 새는 이동과 탄생, 아직 드러나지 않은 가능성을 상징하는 존재로 읽을 수 있다.

돌 속에 새가 있다는 설정은 완성된 형상을 보여주기보다 앞으로 나타날 무언가를 상상하게 한다. 겉으로는 아무 변화도 없어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내부에서는 새로운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는 셈이다.

김명준이 변화가 시작되는 순간을 바라본다면, 노형규는 변화가 이미 세계 안으로 스며든 뒤의 상태에 주목한다. 두 작품은 서로 다른 시간에 서 있지만 하나의 흐름 안에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소멸이 아니라 이행을 이야기하는 회화

이번 전시는 무언가가 사라지는 장면을 끝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낡은 질서가 무너지고 익숙한 풍경이 달라지는 과정에는 불안이 따르지만, 그 안에는 새로운 상태로 이동할 가능성도 존재한다. 김명준과 노형규의 작품은 변화 이전과 이후를 나란히 보여주며 소멸을 또 다른 생성의 과정으로 바라보게 한다.

그래서 작품 앞에서는 명확한 서사보다 감각이 먼저 다가온다. 균열과 돌,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바라보는 동안 관람객은 자신의 기억 속에 남은 변화의 순간을 떠올릴 수 있다.

여러분에게 아직 식지 않은 잔상은 무엇인가. 이미 끝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현재의 감정과 선택에 영향을 주는 장면이 있을지도 모른다.


작품 사이에서 발견하는 미세한 움직임

《잔상의 온도》를 감상할 때는 두 작가의 작품을 각각 분리해 보기보다 서로 이어지는 시간으로 살펴보는 것이 좋다.

한쪽에서는 단단했던 표면에 균열이 발생하고, 다른 쪽에서는 그 변화가 새로운 생명의 가능성으로 이어진다. 작품 사이의 거리와 전시장에 흐르는 시선까지 하나의 서사처럼 느껴질 수 있다.

전시는 거대한 사건을 직접 재현하지 않는다. 대신 사건이 지나간 뒤 공간과 사람에게 남은 변화를 조용히 보여준다. 세계는 갑자기 달라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이전부터 아주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질문을 건넨다.

《잔상의 온도》는 끝난 것과 시작되는 것 사이에서 아직 이름 붙일 수 없는 시간을 바라보는 전시다. 부산 광안리 인근에서 회화를 통해 기억과 변화의 감각을 천천히 마주하고 싶다면 들러볼 만하다.


《잔상의 온도》 전시 정보

전시명: 잔상의 온도
참여 작가: 김명준, 노형규
전시 기간: 2026년 8월 5일~8월 29일
관람 시간: 수~금요일 오후 2시~오후 8시 / 토요일 오전 11시~오후 5시
전시 장소: 스페이스167
주소: 부산광역시 수영구 광안로22번길 60, 2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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