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정미 《빛이 생겨라》, 흙과 불로 빚어낸 가족과 계절의 온기

 

주정미 《빛이 생겨라》, 흙과 불로 빚어낸 가족과 계절의 온기

빛은 혼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무언가에 닿을 때 비로소 모습을 드러냅니다. 창호지를 통과한 빛, 그릇 위에 내려앉은 햇살처럼 말이죠.

서울 인사동 경인미술관에서 열리는 **주정미의 첫 번째 개인전 《빛이 생겨라》**는 흙을 만져온 시간과 가족을 향한 마음을 ‘빛’이라는 이미지로 풀어낸 전시입니다. 전통 창살 문양과 반상기, 봄·여름·가을·겨울의 변화가 도자의 형태와 유약 안에서 하나의 따뜻한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흙을 만지는 시간이 빛이 되다

주정미에게 빛은 단순히 밝고 어두움을 만드는 시각적인 요소만은 아닙니다.

오랫동안 흙을 만지고 형태를 빚어온 시간이 쌓이면서 작가 내면에서 만들어진 감정과 기억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도예는 빠르게 완성되는 작업이 아닙니다. 흙을 고르고 형태를 만들고 말린 뒤 유약을 입히고 불을 통과해야 비로소 하나의 작품이 완성됩니다.

이 긴 과정 자체가 작가가 이야기하는 ‘빛’과 닮아 있습니다.


전통 창살에서 발견한 두 개의 십자가

이번 전시의 출발점 가운데 하나는 전통 창살 문양입니다.

작가는 창살의 형태를 새기던 과정에서 두 개의 십자가와 마주했고, 창호지 사이로 빛이 들어오는 작은 틈에도 주목했습니다.

창은 안과 밖을 나누지만 동시에 두 공간을 연결합니다.

빛 역시 그 작은 틈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옵니다.

저도 한옥의 창호를 볼 때 재미있다고 느끼는 부분이 있습니다. 완전히 막힌 벽 같지만 햇빛이 들어오는 순간 공간의 분위기가 전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주정미의 작업에서도 그 작은 틈이 중요한 상징으로 작동합니다.


가족을 향한 마음이 머문 그릇

《빛이 생겨라》는 작가 개인의 삶과도 가까이 연결돼 있습니다.

전시에서는 가족을 향한 마음과 삶의 궤적이 그릇이라는 친숙한 형태에 담깁니다.

특히 반상기는 매일의 밥상을 구성하는 가장 일상적인 그릇입니다.

화려한 의식을 위한 도자기가 아니라 하루 세 끼를 담는 그릇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작가는 이런 평범한 생활도구 안에 가족과 함께한 시간, 매일 반복되는 삶의 의미를 담아냅니다.


봄·여름·가을·겨울을 반상기에 담다

이번 작품에서는 사계절도 중요한 주제로 등장합니다.

봄에 봉오리가 생기고 꽃이 피며, 여름의 강한 빛을 지나 가을과 겨울로 이동합니다.

작가는 이 순환하는 시간을 반상기와 도자의 형태로 표현합니다.

형태는 봉오리에서 만개하는 꽃처럼 변화하고 유약의 색도 계절의 햇빛처럼 번져갑니다.

같은 그릇이어도 형태와 색에 따라 봄처럼 가볍게 느껴지거나 겨울처럼 고요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유약은 작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도예에서 유약은 상당히 흥미로운 재료입니다.

칠할 때 보이는 색과 가마에서 구워진 뒤의 색이 다를 수 있고, 온도와 유약의 두께에 따라서도 표면이 달라집니다.

주정미의 작업에서도 유약이 흘러가고 번지는 과정은 중요한 표현이 됩니다.

작가가 방향을 만들 수는 있지만 불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를 완전히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그 때문에 각각의 작품에는 조금씩 다른 표정이 남습니다.

여러분은 완벽하게 동일한 그릇과 불이 만들어낸 작은 차이가 남은 그릇 중 어느 쪽에 더 마음이 가시나요? 도예의 매력은 바로 이런 예측할 수 없는 차이에도 있습니다.


흙과 불이 만든 계절의 얼굴

흙은 처음에는 부드럽고 쉽게 변하는 재료입니다.

하지만 불을 통과하면 단단한 도자가 됩니다.

유약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마의 온도 속에서 녹고 흐르면서 처음과 전혀 다른 표면을 만들어냅니다.

작가는 이 과정을 통해 각각의 계절에 서로 다른 얼굴을 부여합니다.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이 단순히 색으로만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흙의 형태와 유약의 흐름, 표면의 질감으로 표현됩니다.


‘빛이 생겨라’라는 제목이 말하는 것

전시 제목 **《빛이 생겨라》**는 상당히 강한 문장입니다.

하지만 작품들은 거대하거나 화려한 빛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창호지 틈으로 들어오는 작은 빛, 매일 사용하는 그릇 위에 머무는 햇살처럼 생활 가까이에 있는 빛에 집중합니다.

그래서 이 전시에서 빛은 특별한 사건보다 평범한 일상을 조금 더 따뜻하게 바라보게 만드는 힘에 가깝습니다.


그릇 하나가 마음에 닿는 순간

도자기는 손으로 들고 음식을 담아 사용하는 매우 가까운 물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회화나 조각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람의 일상에 들어옵니다.

주정미의 《빛이 생겨라》는 도자를 감상하는 전시이면서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그릇과 가족의 밥상, 계절의 변화 속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쌓여 있는지 돌아보게 하는 전시입니다.

작품을 볼 때 형태만 빠르게 확인하기보다 유약이 어디에서 짙어지고 흐려지는지, 그릇의 형태가 어떤 계절을 떠올리게 하는지 천천히 살펴보세요.

소박한 그릇 안에서 생각보다 따뜻한 빛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정미 《빛이 생겨라》 전시 정보

전시명: 《빛이 생겨라》
작가: 주정미
전시 기간: 2026년 8월 26일~8월 31일
관람 시간: 수요일 10:00~19:00 / 목~월요일 10:00~18:00
전시 장소: 경인미술관 제2전시실
주소: 서울 종로구 인사동10길 11-4
주요 분야: 도예
주요 키워드: 빛, 가족, 반상기, 전통 창살, 사계절, 유약, 흙과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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