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서보와 흐엉 도딘 《비움 그 충만》, 반복과 빛이 만나는 회화
박서보와 흐엉 도딘 《비움 그 충만》, 반복과 빛이 만나는 회화
선을 반복해서 긋고 또 긋습니다. 다른 화면에서는 광물 안료가 수십 겹 쌓이며 빛이 천천히 올라옵니다. 한쪽은 반복적인 행위로 화면을 비우고, 다른 한쪽은 색을 겹쳐 깊은 침묵을 만들어냅니다.
서울 연희동에 문을 여는 **박서보미술관의 개관전 《박서보와 흐엉 도딘: 비움 그 충만》**은 한국 단색화의 대표 작가 박서보와 베트남 출신 프랑스 작가 흐엉 도딘의 2인전입니다. 서로 다른 문화와 세대를 살아온 두 작가를 ‘절제·반복·수행’이라는 공통된 미학으로 연결해 회화의 본질을 바라봅니다.
박서보미술관의 첫 전시가 두 작가인 이유
박서보미술관은 박서보라는 한 작가의 업적을 기념하는 데서 출발하지만, 첫 전시는 그의 작품만으로 구성하지 않았습니다.
흐엉 도딘을 함께 소개하면서 박서보의 작업을 한국 단색화라는 범주를 넘어 더 넓은 현대 추상회화의 흐름에서 바라보도록 합니다.
박서보가 신체적인 반복과 화면의 물성을 통해 시간을 축적했다면 흐엉 도딘은 안료의 층과 빛, 여백을 통해 명상적인 공간을 만들어왔습니다. 방식은 다르지만 두 작가 모두 무엇인가를 과하게 드러내기보다 덜어내고 집중하는 태도에 가까워집니다.
박서보의 ‘묘법’, 그리는 것이 아니라 반복하는 행위
박서보의 대표적인 작업은 《묘법(Écriture)》 연작입니다.
‘Écriture’는 프랑스어로 ‘쓰기’를 뜻합니다. 하지만 작품에는 우리가 읽을 수 있는 문장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연필이나 도구, 손가락으로 화면에 선을 반복해서 긋는 행위 자체가 중요합니다. 특히 한지를 활용한 후기 묘법에서는 젖은 한지를 밀고 긁으면서 화면에 일정한 골과 리듬을 만들어냈습니다.
저도 박서보의 작품을 가까이서 보면 단순한 단색 화면이라는 첫인상보다 손이 지나간 흔적과 반복의 리듬에 더 오래 시선이 머뭅니다. 멀리서 볼 때와 가까이서 볼 때 전혀 다른 작품처럼 느껴지는 이유입니다.
반복은 왜 ‘비움’이 될까
무언가를 계속 반복하면 화면에는 흔적이 더 많아지니 오히려 ‘채움’에 가까워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박서보에게 반복은 감정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행위라기보다 자신을 덜어내는 수행에 가까웠습니다. 같은 행동을 지속하면서 개인적인 감정이나 충동을 화면 밖으로 밀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서 반복은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합니다.
수많은 선이 쌓였지만 화면이 소란스럽기보다 오히려 고요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흐엉 도딘, 빛을 층층이 쌓는 화가
흐엉 도딘(Huong Dodinh)은 베트남에서 태어나 프랑스를 기반으로 활동해온 추상회화 작가입니다.
그의 작업에서는 광물 안료를 여러 겹 쌓는 방식이 중요합니다. 색을 단번에 강하게 올리는 것이 아니라 얇은 층을 반복하면서 빛이 화면 깊숙한 곳에서 올라오는 듯한 효과를 만들어냅니다.
멀리에서는 매우 절제된 단색 화면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미세한 색의 차이와 깊이가 드러납니다.
박서보가 선과 물성으로 시간을 쌓는다면, 흐엉 도딘은 색의 층으로 시간을 쌓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회화가 같은 지점에서 만나다
두 작가의 작품은 외형적으로는 상당히 다릅니다.
박서보의 화면에는 선과 물성이 강하게 느껴지고, 흐엉 도딘의 작업에서는 빛과 색의 층이 중심이 됩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한 번의 강한 제스처보다 반복과 절제를 선택합니다.
선을 반복하고 색을 반복해서 겹칩니다. 작품이 완성될수록 무엇인가를 더 많이 보여주기보다 오히려 불필요한 요소가 줄어듭니다.
여러분은 ‘비어 있는 화면’과 ‘충만한 화면’을 서로 반대라고 생각하시나요? 이번 전시는 두 상태가 어쩌면 같은 지점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단색화를 색 하나로만 보면 놓치는 것
박서보는 한국 단색화의 대표 작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단색화를 단순히 ‘한 가지 색으로 그린 회화’라고 이해하면 작품의 중요한 부분을 놓칠 수 있습니다.
단색화에서는 반복되는 행위와 재료의 변화, 시간이 축적되는 방식이 중요합니다. 화면에 무엇을 묘사했느냐보다 작가가 어떤 방식으로 물질과 관계를 맺었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흐엉 도딘의 작품과 박서보의 작업이 왜 같은 전시에 놓였는지도 조금 더 자연스럽게 이해됩니다.
박서보의 작품을 새로운 시선으로 보는 방법
박서보미술관에서 박서보의 작품을 본다는 것은 조금 특별한 경험일 수 있습니다.
작가를 기념하는 공간에서는 작품이 쉽게 ‘거장의 대표작’이라는 틀 안에 갇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개관전은 다른 문화권에서 활동한 흐엉 도딘과 함께 작품을 배치하면서 박서보를 다시 비교하게 만듭니다. 박서보의 선과 흐엉 도딘의 색, 한지의 물성과 광물 안료의 깊이가 서로를 비추는 식입니다.
한 작가를 더 잘 보기 위해 다른 작가와 나란히 놓는 방식이 이번 전시의 중요한 관람 포인트입니다.
‘비움’이 만들어내는 충만함
전시 제목 **《비움 그 충만》**에는 두 작가를 연결하는 핵심이 압축되어 있습니다.
비운다는 것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박서보는 반복을 통해 불필요한 표현을 덜어내면서 선과 재료의 흔적을 더 선명하게 만들었습니다. 흐엉 도딘 역시 제한된 색과 반복적인 층을 통해 오히려 화면의 빛과 깊이를 강화합니다.
두 작가에게 비움은 결핍이 아니라 더 본질적인 것을 남기기 위한 과정입니다.
그래서 이 전시는 화려한 이미지를 빠르게 소비하기보다 한 작품 앞에 조금 오래 머무는 편이 잘 어울립니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보였던 화면 안에서 점차 선과 색, 재료와 빛의 작은 차이가 모습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박서보와 흐엉 도딘: 비움 그 충만》 전시 정보
전시명: 《박서보와 흐엉 도딘: 비움 그 충만》
영문명: Park Seo-Bo & Huong Dodinh: Emptiness, Fullness
작가: 박서보, 흐엉 도딘
전시 기간: 2026년 8월 21일~2027년 1월 3일
전시 장소: 박서보미술관 전관
주소: 서울 서대문구 연희로24길 9-2
작품 구성: 회화 42점
주요 키워드: 묘법, 단색화, 반복, 수행, 여백, 빛, 추상회화
※ 일부 초기 전시 안내에는 종료일이 2026년 12월 31일로 표기되어 있으나, 현재 박서보미술관 공식 전시 페이지에는 2027년 1월 3일까지로 안내되어 있습니다. 방문 일정은 공식 안내 기준으로 확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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