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황래 《산수여행》, 걸어온 산수를 수묵으로 다시 그려낸 시간
정황래 《산수여행》, 걸어온 산수를 수묵으로 다시 그려낸 시간
산수화는 눈앞에 보이는 산과 물을 그대로 옮겨 놓은 그림일까. 정황래의 작업을 따라가다 보면 산수는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직접 걷고 바라보고 들었던 시간이 쌓여 만들어지는 하나의 기억이라는 생각이 든다.
서울 북촌 CN갤러리에서 열리는 **정황래 개인전 《산수여행-걸어온 산수 그려낸 시간》**은 작가가 오랜 시간 직접 산을 찾아다니며 축적한 경험을 수묵으로 풀어낸 전시다. 이번 작업의 중요한 출발점은 2007년 여름 방문했던 금강산이다. 이후 설악산과 중국 황산·화산·숭산·태항산·태산으로 이어진 산수 체험이 작품 세계를 넓혀왔다.
20년 가까이 마음속에 남아 있던 금강산
정황래에게 금강산은 단순히 한 번 다녀온 여행지가 아니다.
구룡폭포와 삼선암, 만물상 등을 직접 걸으며 바라본 풍경은 오랫동안 작가의 기억 속에 남았다.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 소정 변관식 등 선배 화가들이 바라봤던 산수를 자신의 눈과 몸으로 다시 경험했다는 점도 의미가 컸다.
당시의 사생과 현장 사진은 시간이 흐르면서 단순한 자료를 넘어 하나의 잔상으로 남았다. 이번 전시는 그 오래된 기억을 다시 꺼내 화면 위에서 연결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사생에서 ‘산수’로 이동하다
이번 전시를 이해하는 중요한 표현이 ‘사생에서 산수로’다.
사생은 현장에서 눈앞의 대상을 직접 관찰해 기록하는 작업이다. 반면 정황래의 최근 산수는 실제 풍경을 그대로 옮기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직접 본 산의 형태와 당시 들었던 소리, 이동하면서 느낀 감정과 시간이 다시 조합된다. 객관적으로 관찰했던 풍경이 시간이 흐르면서 작가의 주관적인 산수로 바뀌는 것이다.
저도 산수화를 볼 때 실제 장소와 얼마나 비슷한지부터 확인했던 적이 있는데, 이런 작업을 만나면 오히려 ‘작가가 그곳에서 무엇을 느꼈는가’를 보는 편이 훨씬 흥미롭다.
6m 화면에 펼쳐진 금강산의 기억
전시에서 눈여겨볼 작품 가운데 하나는 금강산을 중심으로 제작한 대형 수묵 산수다.
약 223×610cm의 화면에 왼쪽 구룡폭, 오른쪽 귀면암과 삼선암, 중앙에 만물상을 배치했다. 일반적인 수묵담채와 달리 다른 색을 배제하고 먹빛의 농담만으로 산의 깊이와 공간감을 표현한 점이 특징이다.
화면 곳곳에는 관폭정과 금강문, 다리와 등산객 같은 작은 요소가 등장한다.
웅장한 자연 한가운데 인간이 아주 작게 자리하면서 사람이 자연을 지배하는 풍경이 아니라 자연 안으로 들어가 함께 머무는 산수의 세계를 만든다.
두루마리에 이어지는 여행의 기록
현장에서 제작한 사생 작품도 이번 전시의 중요한 축이다.
정황래는 산수 여행 중 낮에 경험한 풍경을 숙소로 돌아온 뒤 늦은 시간까지 기록하는 작업을 지속해왔다. 이런 기록은 때로 《태항소견1》처럼 대형 작품으로 발전하고, 《황산도》처럼 길이 8m가 넘는 두루마리 형태로 이어지기도 했다.
두루마리 형식은 산수를 한눈에 고정된 장면으로 보여주기보다 시선을 움직이며 천천히 따라가도록 만든다.
마치 실제 산길을 걷듯 화면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하면서 풍경을 경험하게 되는 셈이다.
먹의 농담으로 산의 기운을 표현하다
정황래의 작품에서는 산의 세부 형태를 모두 묘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수묵의 짙고 옅은 차이, 붓이 지나가는 속도와 방향을 이용해 산의 구조를 단순화한다. 굵고 강한 필획은 암벽의 힘을 느끼게 하고, 흐릿하게 번지는 먹은 먼 산과 안개의 깊이를 만든다.
같은 검은 먹으로도 수십 가지 농담이 만들어진다는 점이 수묵 산수의 매력이다.
여러분은 산을 바라볼 때 능선의 정확한 형태가 먼저 기억나는가, 아니면 그날의 공기와 바람, 빛이 먼저 떠오르는가. 정황래의 산수는 후자에 조금 더 가까워 보인다.
겸재와 단원이 걸었던 길을 다시 걷다
정황래의 산수 여행에는 한국 산수화의 전통도 자연스럽게 연결돼 있다.
과거의 화가들도 실제 산천을 여행하고 그 경험을 작품으로 남겼다. 정황래 역시 선인들의 작품 속 장소를 직접 찾아가며 과거와 현재의 시선을 겹쳐 본다.
하지만 옛 산수의 형식을 그대로 반복하지는 않는다.
현대의 등산로와 여행 경험, 개인의 기억을 다시 조합하면서 오늘날의 시선으로 산수를 새롭게 구성한다. 전통 산수화가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계속 변화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산수는 한 번 보고 끝나는 풍경이 아니다
같은 산을 다시 찾아가도 풍경은 늘 달라진다.
계절과 날씨가 변하고 빛의 방향도 달라진다. 무엇보다 그 산을 바라보는 사람 자신의 마음이 바뀐다.
정황래는 바로 이러한 변화 속에서 산수를 바라본다. 한 번의 사생으로 풍경을 완성하기보다 여행과 기억, 다시 그리는 시간을 반복하면서 자신만의 자연을 만들어간다.
《산수여행-걸어온 산수 그려낸 시간》은 산을 그린 전시이면서 한 작가가 산과 함께 지나온 시간을 기록한 전시다.
수묵 산수의 전통적인 매력과 현장 사생, 기억을 바탕으로 한 현대적인 산수 표현을 함께 보고 싶다면 천천히 작품의 필선과 공간을 따라가 볼 만하다.
정황래 《산수여행-걸어온 산수 그려낸 시간》 전시 정보
전시명: 정황래 개인전 《산수여행-걸어온 산수 그려낸 시간》
작가: 정황래
전시 기간: 2026년 8월 19일~8월 30일
관람 시간: 10:00~18:00
휴관일: 월요일 및 공휴일
전시 장소: CN갤러리
주소: 서울 종로구 북촌로5길 56-7
주요 작품 소재: 금강산, 설악산, 황산, 화산, 숭산, 태항산, 태산
주요 표현: 수묵 산수, 현장 사생, 두루마리 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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