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기언 개인전 《흑백의 분투》, 수묵으로 바라본 인간과 자연의 긴장

 

윤기언 개인전 《흑백의 분투》, 수묵으로 바라본 인간과 자연의 긴장

도시를 걷다 보면 자연 그대로인 듯 보이지만 사실은 인간의 손길이 깊게 개입된 풍경을 자주 만납니다. 일정한 간격으로 심어진 가로수, 산을 뚫어 만든 터널, 도로를 따라 정돈된 나무들이 대표적입니다.

윤기언 작가의 개인전 《흑백의 분투》는 이러한 익숙한 풍경을 수묵이라는 전통적인 매체로 다시 바라보는 전시입니다. 전시는 2026년 8월 20일부터 10월 8일까지 서울 종로구 OCI미술관에서 열립니다. 흑과 백, 획과 여백을 통해 인간과 자연이 서로 밀고 당기는 관계를 깊이 있게 보여줍니다.




흑과 백은 서로 대립하면서 완성된다

이번 전시에서 흑과 백은 단순한 색의 대비가 아닙니다.

수묵화에서 먹으로 그어진 획과 비어 있는 여백은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보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한 획을 긋는 순간 그 주변의 여백도 함께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윤기언은 이러한 수묵의 구조를 인간과 자연의 관계로 확장합니다.

도시가 자연을 계획하고 통제하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나무는 다시 자라고 풀이 번지며 정돈된 공간도 조금씩 흐트러집니다. 인간의 개입과 자연의 복원이 끝없이 반복되는 셈입니다.

이 긴장이 바로 전시 제목의 ‘분투’와 연결됩니다.


소도시에서 발견한 인위적인 자연

윤기언은 소도시로 거처를 옮긴 뒤 일상적으로 지나던 도로와 가로수, 다리와 터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산을 깎아 만든 길과 규칙적으로 심어진 나무는 자연처럼 보이지만 사실 인간의 필요에 따라 설계된 풍경입니다. 작가는 이러한 장면을 사실적으로 복제하지 않고 먹의 농담과 번짐, 붓질의 흔적으로 다시 구성합니다.

저도 길가의 가로수를 볼 때는 그냥 도시 풍경의 일부라고 생각했는데요. 윤기언의 작업을 알고 나면 한 줄로 서 있는 나무들이 오히려 인간의 계획과 자연의 생명력이 맞부딪히는 장면처럼 보입니다. 익숙한 풍경을 낯설게 보게 만든다는 점이 꽤 인상적입니다.


《가로수》와 《터널》이 보여주는 경계

이번 전시에서는 《가로수》 연작과 《터널》이 중심적으로 소개됩니다.

《가로수》는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된 나무를 통해 자연을 통제하려는 인간의 태도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나무는 시간이 흐르며 가지를 뻗고 형태를 바꾸면서 계획된 질서에서 조금씩 벗어납니다.

《터널》은 자연을 뚫고 만든 인공 구조물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공간으로 이동하는 통로입니다. 인간이 자연 안에 만든 흔적과 그 흔적을 다시 감싸는 자연의 시간이 한 화면에 겹쳐집니다.

여기에 《묶인 나무》, 《줄지어 서다》, 《불타오르듯》 등의 작업이 이어지면서 전시는 작가가 실제 이동 중 마주한 풍경과 그 안에서 변화한 시선을 함께 보여줍니다.


수묵에서 중요한 것은 통제와 우연

먹은 완전히 통제하기 어려운 재료입니다. 붓을 움직이는 방향은 작가가 결정할 수 있지만 물이 번지는 속도와 종이에 스며드는 흔적까지 완벽하게 예측하기는 어렵습니다.

윤기언은 이러한 수묵의 성질을 적극적으로 활용합니다. 의도한 붓질과 우연히 생긴 흔적이 한 화면 안에서 공존하면서 인간의 계획과 자연의 힘이라는 전시 주제가 재료 자체에서도 반복됩니다.

그래서 작품을 볼 때는 무엇을 그렸는지만 확인하기보다 먹이 번진 부분과 비어 있는 여백, 선의 강약을 함께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화면 속 흑과 백 사이에서 작가의 선택과 재료의 우연이 어떻게 균형을 이루는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윤기언 작가 이력

윤기언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사와 미술학 박사 과정을 마쳤습니다. 2003년 《불안》을 비롯해 《진동》, 《미묘한 순간》, 《부득이하게》, 《우공이산》 등 꾸준히 개인전을 열어왔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와 OCI미술관 레지던시에 참여했으며, 서울시립미술관 SeMA 신진작가 전시지원 프로그램과 서울문화재단 예술작품지원사업 등에 선정됐습니다.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OCI미술관 등 여러 기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전시 정보

전시명: 2026 OCI AGAIN 귀한인연 윤기언 개인전 《흑백의 분투》
작가: 윤기언
전시 기간: 2026년 8월 20일~10월 8일
관람 시간: 화요일~토요일 오전 10시~오후 6시
장소: OCI미술관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우정국로 45-14

《흑백의 분투》는 자연과 인간을 어느 한쪽의 승패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인간이 자연을 바꾸고 자연이 다시 인간이 만든 질서를 흔드는 반복 속에서 서로가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익숙한 가로수와 터널을 다시 바라보고 싶다면, 윤기언의 흑과 백 사이에 남겨진 긴장과 여백을 천천히 따라가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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