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필(Moon Jae pil)충남 무형유산 제47호 칠장
문재필 칠장, 옻칠을 재료에서 존재로 변화시키다
옻칠은 흔히 목가구나 공예품의 표면을 보호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전통 재료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충남 무형유산 제47호 칠장 문재필에게 옻칠은 단순한 마감재가 아니다. 자연의 시간과 인간의 노동, 생명의 순환과 존재의 의미를 담아내는 하나의 예술 언어다.
문재필 작가는 1962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나 1980년 목칠공예에 입문했다. 오랜 시간 옻칠의 성질과 전통 기법을 연구해왔으며, 2013년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47호 칠장으로 지정됐다. 2022년에는 프랑스 국립 세브르박물관 초대전에 참여했고, 2023년에는 논산에 문재필 옻칠미술관을 개관하며 국내외에서 작품세계를 확장하고 있다.
백 White (2023)자연에서 얻은 옻칠의 시간
옻칠은 옻나무에서 채취한 수액을 정제하고 여러 차례 칠한 뒤 건조하는 과정을 반복해야 완성된다. 온도와 습도에 민감하기 때문에 작업자의 경험과 기다림이 작품의 결과에 직접 영향을 준다.
문재필은 이러한 옻칠의 까다로운 성질을 억지로 통제하기보다 자연과 협력하는 과정으로 받아들인다. 작가의 손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나무와 옻, 공기와 습도, 시간이 함께 작품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의 작업이 빠른 생산과 즉각적인 결과보다 꾸준함과 반복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문재필 작가는 작품을 제작할 때 처음 계획한 방향대로 완성되고 있는지 끊임없이 질문하며, 먼 미래에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남을 수 있는 작품인가를 고민한다고 밝힌다.
전통 공예에서 현대 조형예술로
문재필의 작품은 전통 옻칠 기법을 그대로 재현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판재와 삼베, 난각과 옻칠을 결합해 칠화와 가구, 입체 조형작품을 제작한다.
검은 옻칠의 깊은 광택과 난각의 밝은 색, 나무와 삼베의 거친 질감은 서로 대비되면서 하나의 화면과 구조를 만든다. 작가는 검은색이 돋보이기 위해서는 다른 색이 필요하다고 말하며, 서로 다른 재료가 만나는 과정에서 관계의 본질을 생각한다.
이러한 작업은 옻칠을 실용적인 공예 재료에서 독립적인 현대미술의 매체로 변화시킨다. 재료는 더 이상 작품을 만들기 위한 수단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 시간과 기억을 품은 존재가 된다.
《재료에서 존재로》가 말하는 것
2026년 부산 갤러리재희에서 열린 문재필 개인전 《재료에서 존재로》는 작가의 이러한 철학을 보여주는 전시다.
문재필은 지구와 바다, 생명과 순리, 윤회와 해탈, 지혜를 주제로 자연과 현대 문명의 관계를 탐구한다. 작품 속 원형과 반복되는 구조, 깊이 있는 옻칠의 표면은 생명이 태어나고 사라진 뒤 다시 이어지는 순환을 떠올리게 한다.
전시 제목에서 ‘재료’는 옻과 나무, 삼베와 난각을 의미하지만, ‘존재’는 오랜 시간과 노동을 통과해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 작품을 가리킨다. 자연에서 얻은 물질이 작가의 손과 철학을 만나 하나의 독립적인 존재로 변화하는 것이다.
문재필의 작품은 자연과 문명, 삶과 죽음, 시작과 끝을 서로 분리된 것으로 보지 않는다. 모든 것은 하나의 흐름 속에서 연결돼 있으며, 인간 역시 자연의 질서에서 벗어난 존재가 아니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문재필 작품을 감상하는 방법
문재필의 작품을 볼 때는 먼저 옻칠 표면에 반사되는 빛을 살펴보는 것이 좋다. 관람 위치와 조명에 따라 검은색과 붉은색, 금빛의 깊이가 다르게 나타난다.
다음으로 나무와 삼베, 난각이 어떻게 결합돼 있는지 관찰해보자. 서로 다른 재료가 자신의 성질을 유지하면서도 하나의 질서를 만드는 과정을 발견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작품의 형태만 보지 말고 그 안에 쌓인 제작 시간을 상상해보면 좋다. 여러 번 칠하고 말리고 다듬는 반복 속에서 재료는 하나의 예술적 존재로 변화한다.
문재필은 전통을 보존하는 칠장이면서 동시에 전통을 새롭게 해석하는 현대 조형작가다. 그의 옻칠은 과거의 기술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과 자연이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묻는 깊은 사유의 공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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