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훈 원화전 《내일의 낙원》(서울 그라운드시소 이스트)
이기훈 원화전 《내일의 낙원》, 동물 가면을 쓴 아이들이 지켜내는 세계
복잡한 세상의 소음에서 벗어나 잠시 머물 수 있는 낙원이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그라운드시소 이스트에서 열리는 이기훈 원화전 《내일의 낙원》은 동물 가면을 쓴 아이들과 거대한 자연, 서로를 지키며 살아가는 작은 존재들의 이야기를 담은 전시다.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에서 주목받은 이기훈 작가의 국내 첫 대규모 원화전으로, 그림책에서 출발한 서사를 회화와 공간 연출을 통해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동물 가면을 쓴 아이들의 이야기
이기훈 작가의 그림에는 얼굴 대신 동물 가면을 쓴 아이들이 자주 등장한다.
가면은 아이의 정체를 감추는 장치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거친 세계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보호막으로도 읽힌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하루를 살아가지만, 각자의 마음속에 두려움과 외로움을 품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과 닮아 있다.
작품 속 아이들은 혼자 세상을 구하려 하지 않는다. 서로를 바라보고 손을 내밀며, 동물과 식물 같은 작은 생명들과 함께 위기를 견뎌낸다. 작가는 연약해 보이는 존재들이 관계를 통해 더 단단해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림 속 이야기가 어린이를 위한 동화처럼 보이면서도 어른들의 마음을 건드리는 이유다.
대홍수 이후에 찾아오는 새로운 낙원
《내일의 낙원》은 대홍수와 방주의 설화를 모티브로 전개되는 거대한 회화 서사다. 파괴된 세계에서 살아남은 존재들이 새로운 터전을 찾아 이동하고, 서로를 지키며 다시 삶을 시작하는 과정이 작품 속에 펼쳐진다.
여기서 낙원은 아무런 고통이나 갈등이 없는 완벽한 장소를 뜻하지 않는다.
이기훈 작가가 보여주는 낙원은 상처 입은 존재들이 서로를 외면하지 않고 함께 살아가기로 선택한 세계에 가깝다. 이미 잃어버린 과거의 낙원이 아니라 지금의 행동과 관계를 통해 만들어가야 할 ‘내일의 낙원’이다.
환경 문제와 전쟁, 경쟁과 불안이 일상이 된 시대에 이번 전시가 전하는 메시지는 더욱 선명하게 다가온다.
원화에서 발견하는 재료의 깊이
이기훈의 작품은 아크릴 물감 위에 오일파스텔을 여러 번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제작된다.
화면을 가까이에서 보면 거칠게 긁힌 선과 두껍게 겹쳐진 색, 손으로 문지른 듯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멀리서 볼 때는 하나의 거대한 풍경으로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수많은 색과 선이 축적된 물질적인 화면이 드러난다.
구름과 파도, 숲과 동물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자연은 작품 속 인물들과 함께 호흡하고 움직이며 이야기의 또 다른 주인공이 된다.
특히 원화전에서는 인쇄된 그림책만으로는 충분히 느끼기 어려웠던 오일파스텔의 질감과 색의 밀도, 대형 작품의 크기에서 오는 몰입감을 직접 경험할 수 있다.
같은 그림에서 발견하는 서로 다른 이야기
이번 전시는 관람객에게 하나의 정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동물 가면을 쓴 아이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거대한 파도 뒤에는 어떤 세계가 기다리고 있는지, 작품 속 존재들이 어디를 향해 가는지는 보는 사람의 경험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어린이에게는 모험과 생명의 이야기로 다가올 수 있고, 어른에게는 불안한 현실을 견디며 내일을 준비하는 자신의 모습으로 보일 수 있다.
작품을 감상할 때는 먼저 멀리서 화면 전체의 풍경과 이야기를 살펴본 뒤, 가까이 다가가 인물의 몸짓과 오일파스텔의 흔적을 관찰해보는 것이 좋다. 작품 속 동물과 식물, 작은 사물들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찾아보는 것도 전시를 즐기는 방법이다.
조은 원화전과 함께 보는 두 개의 세계
그라운드시소 이스트에서는 같은 기간 조은 작가의 《오늘의 정원》도 함께 열린다.
《오늘의 정원》이 지금 이 순간의 일상과 감정을 정원이라는 공간으로 보여준다면, 《내일의 낙원》은 우리가 앞으로 만들어갈 세계를 상상하게 한다. 두 전시는 각각 독립적으로 관람할 수 있으며, 패키지 관람권을 이용하면 두 원화전을 함께 감상할 수 있다.
오늘의 마음을 돌보는 정원과 내일의 희망을 꿈꾸는 낙원을 나란히 비교해보는 것도 좋은 관람 경험이 될 것이다.
이기훈 원화전 《내일의 낙원》은 화려한 판타지 세계를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상처 입은 존재들이 서로를 지켜주며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가는 모습을 통해 우리가 어떤 내일을 선택해야 하는지 질문한다.
세상의 소음과 불안에 지친 사람이라면 동물 가면을 쓴 아이들의 여정을 따라가며 자신만의 낙원을 상상해볼 수 있는 전시다.
이기훈 원화전 《내일의 낙원》 전시 정보
전시명: 이기훈 원화전 《내일의 낙원》
전시 기간: 2026년 7월 17일~11월 29일
관람 시간: 오전 10시~오후 7시
입장 및 매표 마감: 오후 6시
관람 연령: 만 7세 이상
전시 장소: 그라운드시소 이스트
주소: 서울특별시 광진구 아차산로 402, 이스트폴 2층
주차: 관람권 증빙 시 3시간 무료
문의: 1522-1796
티켓 가격과 촬영 가능 여부, 휴관 일정은 예매처와 전시장 운영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므로 방문 전에 공식 안내를 확인하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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